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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8일에 얼리액세스가 열리자마자 팍스데이(Pax Dei)를 결제했다. 중세 배경에 내 손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세운다는 소개만 보고 혹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튜토리얼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에 나 혼자 떨어져 있더라. 그날 밤에 나뭇가지랑 돌만 몇 시간을 주웠다. 그러고도 이 게임을 접지 못한 채 2025년 10월 16일 1.0 정식 출시까지 붙잡고 있었으니, 애증이 좀 있다.

팍스데이가 대체 어떤 게임이냐면
한마디로 중세 생존 샌드박스 MMO다. 개발사는 아이슬란드·핀란드 쪽의 Mainframe Industries인데, 핵심 인력 상당수가 이브 온라인(EVE Online)을 만든 CCP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게임 안에서 강조하는 게 딱 이브식이다. NPC 상인도, 정해진 퀘스트 줄기도 거의 없고, 플레이어가 캐고 만들고 나르고 파는 경제 그 자체가 콘텐츠다.
가격은 기본판이 29,900원대(29.99달러)이고, 프리미엄 멤버십이 월 3,900원대부터 따로 있다. 구독을 강제하진 않지만 창고 칸이나 편의 요소가 걸려 있어서 오래 붙잡을 사람이면 결국 신경 쓰이는 구조다.
팍스데이는 완성된 게임을 사서 즐기는 쪽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을 같이 겪겠다고 발을 담그는 쪽에 가깝다.
이 문장을 산 뒤에 깨달으면 좀 늦다. 나는 알파 때 이걸 모르고 들어갔다가 초반에 현타를 크게 봤다.
집 짓는 재미는 진짜, 문제는 지어놓고 할 게 없다는 것
건축은 이 게임에서 제일 잘 만든 부분이다. 블록을 쌓아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고, 마음먹으면 성벽에 망루까지 올릴 수 있다. 플롯(plot)이라는 땅 구획을 깔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짓는 방식인데, 손재주 있는 사람은 정말 그림 같은 마을을 만든다. 이 크래프팅 자유도만 놓고 보면 젤다 왕국의 눈물에서 울트라핸드로 이것저것 조립하던 재미가 떠올랐다.
문제는 지어놓고 실용적인 의미가 없다는 거였다. 알파 시절 내가 제일 아쉬웠던 게 이거다. 벽 안에 제작대랑 창고 상자만 꾸겨 넣고 나면, 그 거대한 건물이 사실상 테마파크였다. 건물마다 점수를 매겨서 총합으로 상점이나 퀘스트 보드, 물류 창고 같은 마을 시스템이 해금되는 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보상 루프가 약했다.
채집과 제작 자체도 손이 많이 간다. 처음엔 나뭇가지와 돌을 줍는 데서 시작해서 구리, 철로 단계가 올라가는데, 한 단계 올릴 때마다 필요한 재료의 양이 확 늘어난다. 벽돌 몇 개 굽자고 가마 앞에서 한참을 기다린 날도 있었다. 정식 출시로 오면서 죽으면 장비 내구도가 깎이는 개념까지 붙어서, 반복 노동의 무게가 더 늘었다. 이 부분을 즐길 수 있느냐가 팍스데이를 오래 하느냐 마느냐를 가른다. 나처럼 집 짓는 걸 좋아하면 이 노동이 준비 과정으로 느껴지지만, 결과만 빨리 보고 싶은 사람에겐 그냥 지겨운 노가다다.

혼자서는 못 버티게 일부러 막아놨다
두 번째로 크게 체감한 건 채집과 제작이 대놓고 협동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혼자서 모든 자원을 캐고 모든 제작 스킬을 다 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게 설계돼 있다. 전투도, 마법도, 제작도 쓸수록 스킬 레벨이 오르는 방식이라 초반부터 역할을 나눠 특화하는 게 유리하다.
전투와 마법도 마찬가지다. 마법이 따로 스킬창에 있는 게 아니라 보석을 써서 장비를 제작해 입으면, 그 장비에 달린 마법을 쓰는 방식이다. 그러니 무기든 마법이든 결국 재료를 캐고 만들 사람이 있어야 굴러간다. 검을 휘두르는 나, 마법 장비를 뽑는 동료, 광물을 대는 채집꾼이 따로 노는 그림이다.
이게 엘든링에서 내 빌드 하나만 파고들면 끝까지 혼자 밀 수 있던 것과는 정반대다. 소울류는 결국 나 혼자 짊어지고 벽을 넘는 재미인데, 팍스데이는 애초에 혼자 넘으라고 만든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가 하나 있다.
- 아는 사람끼리 시작하지 않으면 진입장벽이 상당하다. 낯선 사람과 군대놀이 하듯 역할을 나누다 현타 오기 쉽다.
- 채집·제작이 은근히 빡세다. 내구도 개념까지 붙으면서 반복 노동이 더 늘었다.
- 외국 대형 길드에 얹혀 가는 게 오히려 편할 수 있다. 한국식 수직 문화랑 안 맞는 지점이 분명 있다.
혼자 뭐든 다 해내는 좀보이드처럼 나 홀로 생존을 파고드는 재미를 기대하고 왔다면 방향이 다르다. 팍스데이의 생존은 개인의 사투가 아니라 무리의 분업이다.
알파 때 최악이던 전투, 1.0에서 손을 봤다
솔직히 알파 버전 전투는 형편없었다. 닷지랑 방패 막기가 설명만 있고 실제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캐릭터가 내 조작이랑 따로 노는 느낌이라 몹 몇 마리 상대하는 것도 답답했다.
이 부분은 정식 출시로 오면서 눈에 띄게 나아졌다. 1.0에서 이동·조작(locomotion) 쪽을 크게 뜯어고쳐서 최소한 컨트롤이 내 의도대로 먹히기 시작했다. 방어에도 무게를 실었는데, 막기를 계속 유지하면 스태미나가 회복되지 않고 이동 속도도 느려지는 페널티가 붙어서 마냥 방패만 들고 있을 수 없게 됐다. 여전히 세키로 같은 손맛을 기대하면 실망하지만, 알파 때를 생각하면 확실히 사람이 할 만해졌다.

PvP존과 죽음 페널티, 지역마다 규칙이 다르다
팍스데이는 지역을 성격별로 나눠놨다. 초반에 머무는 안전지대와 본격 생산·거점 지역, 그리고 분쟁 지역이 각각 다른 규칙을 따른다. 알파 때는 PvP존이 너무 좁고 그 안에 건물을 못 짓는 게 큰 아쉬움이었는데, 1.0에서 클랜이 분쟁 지역 땅을 점유하고 그 안에 건설할 수 있게 열어줬다. 방향은 맞게 잡았다.
던전이 공용이라는 점도 짚어둘 만하다. PvP존에서는 던전을 돌다가 다른 파티에게 뒤치기를 당할 수 있다. 자원을 캐는 사람을 노리거나, 몰래 무역하려는 상대를 관문에서 기다렸다가 덮치는 소규모 전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특정 자원을 독점하거나 무역으로 이득을 보는 그림도 이브 온라인이나 알비온과 닮았다. 다만 알파 기준으로 대규모 공성까지는 아직 멀어 보였고, 이건 서버가 받쳐줘야 가능한 얘기다.
죽었을 때 규칙도 지역마다 갈린다. 표로 정리하면 이렇다.
| 지역 | 성격 | 죽으면 |
|---|---|---|
| 홈밸리(Home Valleys) | 초보 안전지대 | 시체 회수(corpse run) 제거, 부담 최소 |
| 하트랜드(Heartlands) | 생산·거점 핵심 | 소지품은 유지, 겹치는 아이템 일부와 장비 내구도 손실 |
| 분쟁 지역(Lyonesse) | PvP | 클랜 점유지 건설 가능, PvE와 페널티 통일 |
이 개편 덕분에 신규 유저가 초반에 시체 찾으러 뛰어다니다 접는 일은 줄었다. 대신 하트랜드에서는 죽으면 내구도가 깎이니까, 좋은 장비를 걸치고 무리하게 굴리는 건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
렉, 서버, 그리고 지금의 팍스데이
가장 현실적인 벽은 성능이었다. 대규모 전투를 표방하면서 최대 150명 규모 인스턴스를 이야기하는데, 알파 때 체감으로는 한자리에 20명만 모여도 버벅이기 시작했다. 이브 온라인 같은 대규모 정치·경제 판을 그리려면 이 서버 안정성부터 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정식 출시 후 지금(2026년 기준) 동시 접속자는 예전만 못하다. 얼리액세스 초반의 화력이 빠진 건 사실이다. 그래도 코난 엑자일, 아크, 러스트, 알비온 온라인 같은 생존·샌드박스 계열을 좋아했다면 팍스데이의 결은 분명 다르다. 재미있는 건, 팍스데이에는 알파 기준으로 온도나 공복 같은 생존 스트레스 요소가 없었다는 점이다. 코난 엑자일이 배고픔과 갈증으로 사람을 쪼는다면, 이쪽은 그런 압박을 덜어내고 대신 플레이어가 굴리는 경제와 정치에 승부를 걸었다. NPC 노예도 상인도 없이 그 빈자리를 전부 유저가 채우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게임의 성패는 유저가 만든 경제와 정치를 얼마나 재미있게 굴러가게 하느냐에 달렸다. 건축이 아니라 그 뒤가 진짜다.
그래서 지금 사도 되냐면
정리하면 이렇다. 건축과 크래프팅의 자유도 하나는 확실하고,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다른 데서 못 느끼는 재미가 있다. 대신 혼자 조용히 즐길 게임을 찾는다면 방향이 안 맞는다. 액션의 손맛을 원한다면 처음 소울류에 입문할 때 순서를 잡던 그 감각처럼 이 게임에도 적응 순서가 필요하고, 그마저도 이건 손맛이 아니라 분업과 살림에 가깝다.
사기 전에 이것만 스스로 물어보면 후회가 적다.
- 같이 삽질할 친구가 두어 명 있나. 있으면 재미가 두 배, 없으면 반의반이다.
- 완성된 게임을 원하나, 자라는 게임을 원하나. 팍스데이는 아직 자라는 중이다.
- 손맛 액션이 목적인가. 그렇다면 방향이 다르니 다른 게임을 보는 게 낫다.
- 건축 자체가 목적인가. 그거 하나만으로도 본전은 뽑을 만하다.
나는 아직 가끔 접속해서 집을 손본다. 완성된 게임을 산 게 아니라 자라는 게임에 올라탄 거라, 몇 달 뒤 다시 켰을 때 마을 시스템이 붙어 있으면 그때 제대로 눌러앉아 볼 생각이다. 같이 삽질할 사람 두어 명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권할 만하다. 진짜 딱 그 조건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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