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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레타리아의 밤은 언제나 습기부터 시작됐다. 나는 PS5로 나온 2020년 블루포인트 리메이크판 데몬즈소울을 다시 켰고, 스토리를 이미 한 번 밀어놓은 세이브 위에서 지역 하나를 완전히 어둠 쪽으로 기울일 참이었다. 원작은 2009년 프롬소프트웨어가 만든 PS3 게임이지만, 내가 만진 화면은 안개 입자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리메이크 쪽이었다. 인간 상태로 요석 앞에 서서 일부러 자살을 6번, 7번 반복하는 순간의 그 조용한 각오가 이 밤의 출발점이었다.
안개에 잠긴 보레타리아의 첫 밤
처음 이 세계를 열었을 때 나는 월드텐던시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보스를 잡으면 세계가 밝아지고, 인간 몸으로 죽으면 세계가 어두워진다는 감각만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이 명확한 시스템 이름을 가진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완백 컨텐츠를 한 바퀴 돌고 난 뒤였다.
프롬 게임을 오래 만진 사람이라면 이 애매한 저울질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다크소울2 스칼라를 클리어하면서 캐릭터가 죽을수록 최대 체력이 깎이는 인간성 시스템에 신경을 곤두세운 적이 있었는데, 데몬즈소울의 월드텐던시는 그보다 훨씬 더 세계 자체를 뒤흔드는 저울이었다. 내 죽음이 나 하나로 끝나지 않고 지역 전체의 난이도와 드랍 테이블을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이건 단순한 페널티가 아니라 하나의 파밍 무대 설정이었다.
월드텐던시라는 이중 저울
데몬즈소울의 성향은 두 개의 저울로 굴러간다. 지역마다 붙는 월드텐던시가 있고, 내 캐릭터에게 따로 붙는 캐릭터텐던시가 있다. 월드텐던시는 중립을 한가운데 두고 백 쪽으로 세 단계, 흑 쪽으로 세 단계까지 벌어져 중립을 합쳐 모두 7단계로 나뉘는데, 가장 끝까지 밀린 상태를 완백과 완흑이라고 부른다. 무대도 보레타리아 왕궁부터 스톤팽 갱도, 라트리아의 탑, 폭풍의 사당, 부정의 계곡까지 다섯 세계로 나뉘고 각 세계가 다시 하위 지역으로 쪼개져 있어서, 4-2나 5-2 같은 번호가 곧 성향을 관리하는 최소 단위가 됐다.
세계가 흑에 가까워질수록 적의 공격력이 눈에 띄게 올라간다. 자료를 뒤져 보니 완흑에서는 적의 물리와 마법과 화염 공격력이 모두 1.5배, 곧 50%나 붙는다고 돼 있었는데, 손끝으로 얻어맞던 체감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반대로 완백에서는 적의 최대 체력이 0.8배로 줄어 20%쯤 물러진다. 대신 흑으로 밀수록 적이 떨구는 소울의 양이 늘고, 희귀한 아이템과 강화석의 등급이 함께 올라간다. 나는 이 교환 조건이 좋았다. 세계를 더 위험하게 만들수록 손에 쥐는 광석의 질이 좋아진다는 구조는, 마치 판돈을 키운 만큼 배당이 커지는 도박판을 게임 안에 심어놓은 느낌이었다.

완백과 완흑의 갈림길
완백은 오히려 편안한 길이었다. 보스를 순서대로 정리하며 세계를 밝히면 특정 NPC 이벤트가 열리고, 숨겨진 통로가 드러난다. 나는 완백 상태에서 인간 상태로 NPC 이벤트를 챙겨 먹는 것으로 그 지역의 밝은 쪽 볼일을 마무리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완백까지 밀어둔 지역을 다시 완흑으로 돌리려면 인간 몸으로 죽는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세계가 완흑에 도달하면 완백에서 만났던 우호적인 NPC들이 검은 팬텀으로 돌변해 칼을 겨눠오고, 각 세계에 하나씩 원생데몬이라 불리는 강적이 자리를 잡는다. 이 원생데몬은 한 번에 무색의 데몬즈 소울을 5개나 떨구는데, 다섯 세계를 전부 완흑으로 돌리면 이론상 25개까지 노려볼 수 있는 셈이다. 무색의 데몬즈 소울은 보스 무기와 일부 레어 무기를 최종 단계까지 올릴 때 대장장이 에드에게 건네야 하는 재료다. 보통은 무기를 7단계까지 올려야 데몬즈 소울 강화가 열리는데, 무색 강화만큼은 그런 전제 없이 무기만 있으면 붙는다는 점이 특이했다. 보레타리아 왕궁에서는 처형인 미랄다 근처 들보에서 시체 하나를 뒤지면 완흑을 만들지 않고도 무색 소울 하나를 미리 챙길 수 있었다.
여기서 내 원칙이 하나 생겼다. 완흑을 만든 뒤에도 원생데몬과 검은 팬텀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을 죽이는 순간 세계가 다시 백 쪽으로 기울어 힘들게 만든 완흑이 풀리기 때문이다. 완흑의 드랍률만 빨아먹고 몸통은 그대로 두는 이 얌체 같은 운용이, 오래 파밍을 돌리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표준에 가깝다.
완백과 완흑을 나란히 놓고 보면 데몬즈소울이 얼마나 짓궂은 설계를 했는지 드러난다. 완백은 보상을 주지만 세계를 순하게 만들어 파밍 효율이 떨어지고, 완흑은 세계를 사납게 만들어 나를 몇 번이고 죽이지만 그만큼 손에 남는 것이 두툼해진다. 안전과 수확이 정반대로 걸려 있는 이 저울 위에서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일지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점이, 나에게는 이 게임의 진짜 난이도였다.
세라믹코인과 원생데몬 사이
세라믹코인은 이 성향 시스템이 만든 가장 얄궂은 수집품이다. 이 코인은 완백이나 완흑처럼 저울이 끝까지 밀린 순수 성향 상태에서만 등장하고, 대부분 부술 수 있는 소품 안에 숨어 있다. 나는 완흑을 만든 김에 분열된 세계로 들어가 세라믹코인만 챙기고 빠져나오는 동선을 짰다. 원생데몬과 검은 팬텀은 눈길만 한 번 주고 돌아섰다.
이 코인은 게임 전체에 걸쳐 26개가 흩어져 있고, 완백과 완흑을 오가며 전부 모아야 완성된다. 모은 코인을 폭풍의 사당 둥지에 있는 까마귀 스파클리에게 넘기면 녹슨 열쇠로 바뀌는데, 그 열쇠는 보레타리아 왕궁 안뜰의 잠긴 문을 여는 데 쓰이고 문 너머에는 관통자 세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까마귀는 세라믹코인 말고도 황금 가면이나 신의 부적 같은 물건을 받고 무색의 데몬즈 소울을 하나씩 내주기도 한다. 소용돌이처럼 반복되는 이 교환 구조를 보고 있으면, 프롬이라는 회사가 왜 소울류의 원형으로 불리는지 실감이 났다. 세키로가 리듬과 간파의 게임이고 P의 거짓이 정교한 패링의 게임이라면, 데몬즈소울은 세계의 상태 자체를 자원으로 바꿔 캐내는 게임이었다. 같은 프롬의 피를 이었으면서도 결이 이렇게 다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덩어리 파밍의 반복과 리듬
본격적인 노가다는 지역별로 동선이 정해져 있었다. 광산 계열 지역에서는 요석에서 내려와 용벌레 무리를 무한 레이드하며 둔석과 용석 덩어리를 캤고, 갱도 쪽에서는 광부들을 화염폭풍으로 쓸어 예석과 경석을 모았다. 상아탑 계열에서는 문어와 돈벌레를 잡으며 향로와 수석 덩어리를 챙기고, 다시 요석을 타고 같은 구간을 반복했다.
이 반복이 지루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세팅을 매번 조금씩 바꿨기 때문이다. 인간 상태로 강해진 적을 상대하니 안정성이 필요했고, 나는 마법 예리성 반지와 섭리 반지, 상황에 따라 도둑 반지나 강욕 반지를 번갈아 끼웠다. 소울 자취를 던져 애기데몬들을 한자리에 모은 뒤 화염폭풍으로 정리하는 구간에서는 향로 사용이 사실상 필수였다. 가오리 숲처럼 소울 효율이 좋은 자리에서는 은팔찌와 강욕 반지를 끼우고 갈증 마법을 걸어 수급을 극대화했는데, 같은 완흑 상태라도 무엇을 캐느냐에 따라 반지 조합이 통째로 달라진다는 점이 이 파밍을 하나의 작은 빌드 놀이로 만들어줬다.
같은 반복이라도 젤다 왕국의 눈물은 서사와 탐험으로 지루함을 덮고 데몬즈소울은 손맛으로 덮는다. 나는 젤다 왕국의 눈물의 탐험이 매번 새로운 지형으로 지루함을 지워주는 방식이라면, 데몬즈소울의 덩어리 파밍은 정해진 무대를 반복하며 내 손이 점점 정확해지는 데서 오는 만족에 가깝다고 느꼈다. 후자는 분명 취향을 탄다. 과도한 반복은 정신을 멍하게 만들고, 그러다 엉뚱한 지역에서 인간 상태로 죽어 완흑을 헝클어뜨리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데몬즈소울에서 나를 가장 오래 붙든 건 월드텐던시와 캐릭터텐던시가 따로 논다는 점이었다. 지역별 성향인 월드텐던시는 그 지역 보스를 인간 상태로 잡거나 흑화 팬텀을 처치하면 백으로, 인간 상태로 죽으면 흑으로 기운다. 반면 캐릭터텐던시는 내 행동 전체에 붙는 성향이라, 순수한 월영석을 노리고 4-2 제례의 길을 완흑으로 몰아가는 동안에도 나도 모르게 이쪽이 흑으로 물들곤 했다. 캐릭터텐던시가 흑으로 기울면 영체 상태의 최대 체력이 중립 흑에서 95%, 완흑에서는 90%까지 깎여서, 안 그래도 얇은 영체가 더 얇아졌다. 반대로 백으로 기울면 영체 상태의 공격력이 두 단계에 걸쳐 오르고 순백에서 최고가 된다. 두 게이지를 동시에 관리하려니 세이브 파일 하나를 완흑 전용으로 따로 파두게 됐고, 온라인에 연결하면 다른 유저의 성향이 섞여 계산이 어긋나서 완흑 파밍만큼은 오프라인으로 돌리는 습관이 생겼다. 이 번거로움까지가 데몬즈소울다운 맛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순수한 월영석을 향한 집착
이 밤의 진짜 목적은 사실 순수한 강화석이었다. 최상위 등급의 무기 강화에는 덩어리가 아니라 순수한 인석이나 순수한 월영석 같은 희귀석이 필요하다. 나는 초반에 폭풍의 왕 근처에서 도마뱀 두 형제를 겁도 없이 다 잡아버렸는데, 그때 운 나쁘게 순수한 월영석을 딱 하나만 먹었다. 그 하나를 킬리지 강화에 써버린 탓에, 내 무기는 오래도록 한 단계 앞에서 멈춰 있었다.
그래서 이 회차의 완흑 파밍은 그 한 단계를 메우기 위한 집착에 가까웠다. 사신 노가다를 돌며 소울 흔적을 유도해 저격하고, 4-2 제례의 길에서 환영 벽 너머에 숨은 쌍검 해골을 반복해 잡으며 월영석 덩어리를 모았다. 순수한 월영석은 이 쌍검 해골에게서만 아주 드물게 떨어지는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오래 통용된 추정치가 완흑 기준 0.5%, 대략 200번에 한 번꼴이었다. 순수석은 여전히 인색하게만 나왔지만, 이런 확률의 벽 앞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감각은 소울류가 주는 고유한 중독이었다.
돌이켜보면 파이널 판타지 16처럼 화려한 연출로 밀어붙이는 액션과 데몬즈소울은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게임이다. 한쪽이 관객을 압도하는 파도라면, 다른 한쪽은 안개 속에서 광석 하나를 더 캐려고 같은 복도를 스무 번 걷게 만드는 정적이었다. 나는 그 정적 쪽이 좋았다. 완흑으로 기운 보레타리아의 밤은 여전히 습기부터 시작되고, 나는 오늘도 순수한 월영석 하나를 기다리며 요석 앞에 다시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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